전광식의 비채나
- gmthp1
- 2022년 5월 2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2년 7월 28일
BICENA


하늘에 가까운 81층 세련된 공간에서 먹는 한식. 비채나는 더없이 현대적이지만 그 어떤 한식보다 기본에 충실한 요리를 낸다. 그건 전광식 셰프가 본질과 맥락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근본 없이는 어떤 새로움도 만들 수 없다고 믿기에, 비채나는 익숙한 것에 고유의 색을 입혀 새로움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다.
전광식 셰프의 뿌리와 그 시작
지금 가장 상징적인 한식당 중 하나인 비채나를 이끄는 전광식 셰프는 한식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학생 때 학원비를 마련하려고 파스타 가게에서 식기 세척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렇게 양식을 시작했다. 2년쯤 양식을 하면서 늘 그렇듯이 직원들을 위한 점심 식사를 차리던 어느 날, 모든 관점을 바꿔버리는 생각을 한다. “직원들 밥은 한식으로 차리잖아요. 매일 똑같이 밥 짓고, 반찬 만들고, 국을 끓이는데 어느 날 머리를 크게 얻어맞은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한식에 대해 아는 게 있나?’ 한국 음식도 잘 모르면서 외국 음식을 만드는 게 맞는 걸까 싶었어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양식을 접었죠. 갑작스러운 결정도 아니었고, 아쉬운 것도 없었어요. 모든 게 전환되는 충격이었거든요. 순서가 바로잡혔어요. 내 나라 음식을 먼저 하고 나서, 그다음에 다른 걸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게 전광식 셰프의 첫 소속, 한식당 가온이었다.

비채나는 도자기와 화요를 만드는 광주요그룹에서 운영한다.

81층, 세계에서 가장 높은 층에 있는 한식 레스토랑이기도 하다.
비채나와 전광식 셰프의 정체성 중에는 자연스럽게 가온에 뿌리를 두는 부분이 있는데, 식재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점이 그렇다. 각 계절의 제철 재료를 특히 강조해 식재료를 수급하는 일이 매번 큰 과제인데, 한 철이 끝나갈 때는 수급 상황이 바뀌어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럴 때마다 온 시장을 뒤져 식재료를 구하는 일이 만만치 않지만, 그럼에도 전광식 셰프는 반드시 지켜야 할 지점이라고 답한다. 반면 비채나가 가온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무게를 조금 덜었다는 점이다. 가온의 김병진 셰프가 무겁고 진지한 분위기를 일관되게 이어가는 태도를 견지한다면, 비채나의 전광식 셰프는 그보다는 좀 더 자연스럽고 유연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적당히 덜어내는 쪽이다. 비채나는 이렇게 전광식 셰프만의 방식대로 산뜻한 고전을 만든다.

이번 봄 메뉴는 전광식 셰프가 바라본 ‘서울의 봄’을 담았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육전, 쑥전, 돼지감자죽.
비채나가 그리는 계절의 식탁
전광식 셰프가 그려내는 비채나의 디시는 계절에서 출발한다. 분기별 테마를 정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건 ‘전광식 셰프가 느끼는 계절’이다. 각 계절에 대한 느낌을 정리하고 나면, 다음은 그에 맞는 지역을 찾는다. “봄에는 좀 느긋해도 좋잖아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충청도가 떠올라요. 쑥도 많고, 평야도 넓고, 충청도의 넉넉한 기운을 봄 메뉴에 펼쳐내는 거죠. 그런 다음 여름에는 좀 강렬하고 자극적인 면을 보여줄 수 있는 지역을 찾는다면 경상도가 되겠죠. 1년 동안의 결실을 얻는 풍성한 가을에는 한 상에 많은 것을 올리는 전라도, 춥고 건조한 겨울에는 강원도, 하는 식으로 한 시즌의 테마와 메뉴를 구성합니다.” 다만 이번 시즌부터는 방향을 조금 바꿨다. 한 해에 네 지역을 고루 소개하는 건 좋지만 깊이 있게 보여주지 못하는 점이 아쉬워, 서울을 시작으로 이번 해부터는 한 지역의 네 계절을 차려낼 예정이다. 이번 시즌의 테마는 ‘서울의 봄’이다.

(사진 제공: 비채나)
1 곶감을 곱게 갈아 만든 '란'에 계피와 원당으로 맛을 낸 수정과를 더한 곶감수정과.
2 5일 동안 우려낸 사골 육수로 지은 밥 위에 무나물, 참취나물, 고사리, 도라지나물과 직접 만든 청포묵을 올리고 명주조갯살을 넣어 24시간 달여낸 간장을 곁들이는 청포묵 화반.
3 소고기와 가리비, 버섯으로 속을 채운 전복에 버섯 국물을 곁들인 생복만두.
4 누룩소금으로 건조 숙성한 계절 생선. 배추선을 곁들여 먹는다.
비채나의 요리를 관통하는 테마는 ‘뉴 클래식 코리안’이다. 한식의 이전과 지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비채나는 익숙하지만 새롭고, 새롭지만 익숙한 한식을 선보이고자 한다. 옛것에 무턱대고 새로운 것을 더하는 쪽보다는 익숙한 맛에 비채나만의 색을 입혀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식이다. 그렇기에 비채나와 전광식 셰프는 ‘본질’과 ‘맥락’에 대한 고민에 가장 긴 시간을 할애한다. 원형을 제대로 알아야 어떤 것을 덧칠하더라도 본래 모습이 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메뉴를 개발할 때 조리팀 내부 품평회를 하는데, 이때 전광식 셰프가 팀원들에게 하는 이야기에서 그 고민이 그대로 드러난다. “각자 만든 걸 가져와서 먹어보고 이게 어디에서 시작된 건지 물어봅니다. 이런 메뉴가 원래 있었던 건지, 아니면 없던 걸 창작한 건지. 그러면 그냥 스스로 만들었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제일 많아요. 다음에는 그렇게 물어요, 너는 어디에서 태어났냐고.” 비채나는 음식이 본래 무엇이었는지, 원형을 제일 먼저 생각한다.


(사진 제공: 비채나)
한식의 정통성과 새 모습
한식에 장류는 필수지만, 동시에 너무 강렬하기도 하다. 강렬하다는 말은 맛과 향에도 해당되는데, 다른 것들을 덮어버리기 쉽다는 뜻이기도 하다. 짜거나 매워 극단적인 편이라, 전광식 셰프는 장류를 사용할 때 주요 재료를 해치지 않도록 주의한다. 대신 한국의 장만 낼 수 있는 감칠맛은 충분히 활용한다. 장과 향신료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사실이지만, 전광식 셰프는 “좋은 요리는 장과 향신료가 없어도 충분히 맛있어야 하고, 장과 향신료를 곁들여야만 맛있는 게 아니라 ‘더 맛있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한식 밖에서 찾는 것들도 많다. 이를테면 한식 레스토랑이라고 해서 수비드 저온 조리법을 배제하지 않고, 한식이 구현하지 못하는 건 양식이나 다른 나라 요리법을 충분히 활용해 보완하기도 한다. 다만 조심스러운 건 해외 식재료를 사용하는 부분이다. 자칫 한식 고유의 풍미를 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광식 셰프는 비채나를 이끌고 나서 약 4년간은 해외 식재료를 거의 쓰지 않았고, 지금은 필요하다면 조금씩 곁들이고 있다. 직원을 채용할 때는 해외에서 일한 사람을 주로 뽑기도 하는데, 다양한 공부가 되기 때문이다. 한식 외의 것에서도 좋은 요인을 반영해 더 훌륭한 한식을 만드는 것이 전광식 셰프가 바라보는 방향이다.

1 고명으로 송로버섯 가루를 뿌리고, 그 위에 돼지감자 부각을 올리면 돼지감자죽이 완성된다.
2 우유와 막걸리를 발효시켜 만든 타락에 돼지감자와 잣을 넣어 갈아 완성한 돼지감자죽.
지금 한식은 많이 새로워졌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새롭게 바꾸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전광식 셰프가 꾸준히 고민하고, 노력하고, 또 목표로 두는 것 역시 이런 지점이다. “제가 한식을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대단히 보수적이었어요. 해외 식재료를 조금만 사용해도 그건 한식이 아니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정통성을 특히 강조했던 거죠. 지켜야 할 정통성을 깨지 않는 건 물론 중요하지만, 무작정 닫아둔다고 한식이 더 좋아지는 건 아니에요. 이제는 한식을 장르로서 인정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모든 한식이 다르면 좋겠다는 거예요. 이 한식은 이런 장르의 한식, 또 저건 이러한 것들을 기반으로 한 한식. 이렇게 같은 한식이지만 모두 다른 한식인 거죠.” 전광식 셰프는 유서 깊은 고서에 나오는 한식보다는 자신이 직접 먹고 느껴본 한식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오래전 한식은 이어가야 할 중요한 가치인 건 맞지만 지금 시대를 사는 우리가 그 맥락을 직접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요? 다만 그것을 기반으로 내가 알고 있고, 직접 느끼는 한식을 계속 개발할 겁니다. 그게 저와 비채나의 목표예요.”

Sommelier’s Pairing
정갈하고 섬세한 페어링 노태정 소믈리에
비채나의 지배인을 겸하는 노태정 소믈리에는 전광식 셰프가 만드는 음식의 균형을 더 세밀하게 맞출 수 있도록 돕는다. 노태정 소믈리에 역시 양식 다이닝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정갈하고 깊이 있는 비채나의 한식에 맞는 페어링을 선보이고 있다. 한식은 맛이 강해 와인과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노태정 소믈리에는 특히 사과, 자두, 복숭아 등으로 만든 한국 와인과 훌륭한 조화를 이룬다고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내추럴 와인, 화이트 와인도 한식에 페어링하기 어렵지 않다고 한다. 그에게 비채나의 이번 봄 메뉴 중 가장 특징적인 페어링 두 가지를 물었다.
PAIRING 1
돼지감자죽 / 샴페인
우유와 막걸리를 발효시켜 만든 타락에 돼지감자와 잣을 넣어 갈아 만든 죽에 고명으로 송로버섯 가루를 뿌리고, 그 위에 돼지감자 부각을 올린다. 담백한 돼지감자죽에는 샴페인을 곁들이면 좋다. 상큼한 아로마와 미네랄리티가 돼지감자죽의 은은한 짠맛과 시너지를 이뤄 감칠맛을 돋워준다. 돼지감자죽의 담백한 맛과 깔끔한 여운을 끌어올려주는 페어링이다.
PAIRING 2
쑥전 / 화이트 와인
누룩소금에 숙성시킨 도다리살을 새우살과 함께 다져, 쑥 반죽으로 옷을 입혀 튀긴다. 여기에 고명으로 쑥가루를 뿌리고, 무를 갈아 만든 장아찌간장을 함께 낸다. 봄 향을 품은 쑥전에는 화이트 와인, 그중에서도 오스트리아 그뤼너 벨트리너 품종을 추천한다. 우아한 산미와 은은한 플로럴 아로마는 생선살과 잘 어울리고, 특유의 쌉쌀한 풍미는 쑥 향과 개운하게 어우러진다.
비채나
기본과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가장 현대적이며, 동시에 단아한 한식을 선보인다.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층에 있는 한식 레스토랑이라는 점에서도 이미 특별하다. — 산천 코스(점심): 주중 8만5,000원 / 주말 11만 원
— 일월 코스(주중 저녁): 17만5,000원
— 구학 코스(저녁): 주중·주말 21만 원
—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로 300 롯데월드타워 81층
— 10:00~21:00 / 14:30~18:00 브레이크 타임(연중무휴)
— 02-1811-1870
Edit 왕민아 | Photograph 박인호 | Cooperate 미쉐린 가이드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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