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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외딴섬, 아일러 여행기

AN ISOLATED ISLAND, ISLAY

 
‘헤브리데스 제도의 여왕’이라 불리는 아일러섬에서는 위스키뿐 아니라 시시각각 매력적인 자연 경관 또한 경험할 수 있다.

풍미 짙은 위스키와 안온한 자연, 그리고 섬을 느긋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스코틀랜드 남서부의 외딴섬, 아일러는 진중하게 서사를 그려내며 여행자를 불러들인다.


 


아일러로 떠나는 결심

케나크레이그 선착장에 대기 중인 차량들.

아일러섬Isle of Islay으로 향하는 여행자는 크게 두 부류 중 하나일 확률이 높다. 위스키 애호가이거나 하루키스트이거나. 혹은 그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하거나. 나 역시 싱글 몰트위스키 중 아일러 위스키에 빠질 무렵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 여행〉을 만났다. 하루키가 스코틀랜드의 아일러섬에 머물며 오롯이 위스키에 집중하던 그 여행기는 몹시도 매혹적이었고, 언젠가 그곳으로 떠날 날을 고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스코틀랜드를 여행할 기회가 찾아왔다. 사실 아일러섬으로 떠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스코틀랜드 자체가 대중적인 여행지가 아닌 탓에 경유 항공편을 이용해야 하는 데다, 서쪽 해안 외딴 구석에 자리한 아일러섬까지 가려면 글래스고Glasgow에서 경비행기를 타거나 차를 렌털해 배를 타고 건너가는 수고가 뒤따른다. 오가는 데만 하루가 꼬박 걸리고, 숙소와 레스토랑이 적은 섬의 높은 물가까지 감안한다면 기회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오랜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기꺼이 아일러섬 여행을 결심했다.


칼맥 페리에서 즐기는 맥주 한잔의 여유.

글래스고에서 차를 렌털해 케나크레이그Kennacraig 선착장까지 달리는 길은 하일랜드의 대자연을 응축한 애피타이저와 같다. 안온한 정경을 품은 로크 로몬드Loch Lomond 호숫가를 지나 험준한 계곡과 굴곡진 해안을 넘나드는 드라이브가 3시간 가까이 지루할 틈 없이 이어진다. 선착장에서 아일러섬 동쪽의 포트 애스케이그Port Askaig까지 하루 2~3회 칼맥 페리(calmac.co.uk)가 운항한다. 페리에 탑승한 이들은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곧 펼쳐질 여행을 상상하며 2시간 남짓한 항해를 느긋하게 즐긴다. 누군가는 스낵바에서 호기롭게 아일러산 위스키를 주문하지만, 나는 좀 더 인내심을 갖기로 한다. 이번 여정의 첫 위스키는 아일러에서 즐길 계획이니까.


스코틀랜드 깃발 너머로 아일러섬이 바라보인다.



피트 위스키의 매력


아일러에는 보모어Bowmore를 비롯해 라프로익Laphroaig, 아드벡Ardbeg, 라가불린Lagavulin 등 위스키 입문자라면 한 번쯤 접해봤을 법한 증류소부터 가장 최근에 문을 연 아드나호Ardnahoe까지 총 9개의 싱글 몰트위스키 증류소가 산재해 있다. 인구가 3000명 남짓인 이 섬에 이토록 위스키가 중요한 산업으로 자리매김한 배경은 명료하다. 위스키의 주원료인 보리와 깨끗한 물, 그리고 ‘피트peat(이탄)’의 존재 덕분이다. 스코틀랜드의 싱글 몰트위스키는 보리 싹을 틔워 건조시킨 맥아를 사용하는데, 이를 건조하는 작업 과정에 따라 위스키의 풍미가 좌우된다. 아일러에서는 전통적으로 바닷가와 습지의 해초와 이끼가 오랜 시간 굳어 만들어진 피트를 태워 맥아를 건조한다. 아일러의 피트는 바다 내음과 짙은 훈연 풍미가 나는 아일러산 위스키 특유의 정체성이 되었고, 아일러가 스코틀랜드의 주요 위스키 지역에 포함되는 데 일조했다.


페리 스낵바에서 판매하는 아일러산 위스키.

아일러의 마을이 위스키 증류소 주변에 형성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섬의 관문인 포트 애스케이그부터 섬 한복판의 보모어, 그리고 남쪽의 포트 앨런Port Allen 모두 위스키 증류소를 돌아보기 좋은 거점 마을 역할을 한다. 첫째 날은 보모어의 로크사이드 호텔(lochsidehotel.co.uk)에 체크인을 했다. 아일러의 상당수 호텔은 레스토랑이 딸린 일종의 B&B 스타일로 운영된다. 여행자들은 한낮에 위스키 증류소 투어를 다니고 호텔로 돌아와 식사를 하며 하루를 보낸다. 오랜 기간 머물 때는 다른 레스토랑을 이용해보기도 하지만, 메뉴는 대체로 비슷한 편. 섬을 둘러싼 바다에서 나는 신선한 해산물이 주요 식재료이기 때문이다. 넙치, 송어, 대구 등 생선 요리를 비롯해 랑구스틴, 홍합, 가리비 등 각양각색의 해산물을 맛볼 수 있다. 올해 굴 수확량이 현저하게 줄어 하루키가 에세이에 언급한 생굴과 위스키의 환상적인 조합을 경험하지 못한 건 좀 아쉽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는 레스토랑 한쪽의 바로 자리를 옮겨 고대하던 위스키를 즐길 차례다. 아일러의 거의 모든 위스키를 갖추고 있는데, 한국에선 구경조차 하기 힘든 한정판 위스키들이 책처럼 두꺼운 메뉴판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고심 끝에 브룩라디Bruichladdich와 카올 일라Caol Ila의 위스키를 1드램(스코틀랜드에서는 1.722g에 해당하는 드램이라는 단위를 사용하며 술을 판매할 때 한 잔 단위로 낸다)씩 주문해본다. 브룩라디는 산뜻한 아로마가 가득한 반면, 카올 일라는 스모키한 피트 내음이 농밀하게 코끝과 입안을 번갈아 채운다.


로크사이드 호텔 레스토랑에서 주문한 랑구스틴(가시발새우).

아일러섬의 각 증류소에서는 자체적으로 폭넓은 투어 프로그램을 준비한다. 싱글 몰트위스키의 생산 과정 전반을 살펴볼 수 있는 증류소 투어는 물론, 위스키를 비교해가며 시음하는 테이스팅 세션 또한 다양하게 갖추고 있다. 여러 증류소를 방문할 계획이라면 보모어나 라프로익처럼 규모가 큰 곳에서 증류소 투어를 경험한 다음, 라가불린 같은 소규모 증류소에서 테이스팅 세션을 즐겨볼 것을 권한다.


이튿날, 투어를 예약한 보모어 증류소(bowmore.com)로 향한다. 1779년에 탄생한 보모어는 아일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증류소다. 직원들이 사용하던 옛 사택을 숙소로 개조해 운영하기도 한다. 맥아의 건조 단계로 시작해 효소를 주입하는 발효, 물과 알코올을 분리하는 증류, 그리고 이를 단계별로 추출해 최종적으로 오크 통에 저장하기까지 수백 년간 동일한 과정을 반복해온 싱글 몰트위스키 제조 과정은 수도승의 혹독한 수행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그런 지난한 과정을 거친 끝에 완고한 풍미의 위스키가 탄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드벡은 보모어와 더불어 아일러에서 규모가 큰 증류소에 속한다.

2010년 숙성을 시작한 오크 통.

다음 날에는 포트 앨런의 아일러 호텔(theislayhotel.com)로 숙소를 옮겼다. 섬 남부에 모여 있는 라프로익, 라가불린, 아드벡 증류소를 차례로 돌아보기 위해서다. 아일러에는 버스가 운행을 하긴 하지만, 배차 간격이 길고 동선이 제한되어 있어 대개 렌터카를 이용하곤 한다. 다만 렌터카 운전자가 증류소에서의 시음을 포기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위스키 증류소는 이런 희생자를 배려해 호텔로 돌아가 맛볼 수 있도록 작은 바이알에 시음용 위스키를 담아주기도 한다.


라가불린 증류소(malts.com/en-gb/distilleries/Lagavulin)의 기프트 숍에도 몇몇이 기념품을 고르며 동행자가 테이스팅을 마치길 기다리고 있다. 이곳에선 매일 테이스팅 주제를 바꿔서 진행하는데, 마침 캐스크 스트렝스cask strength 세션을 준비 중이다. ‘CS’라 줄여 부르는 캐스크 스트렝스는 알코올 도수가 50~60도에 이른다. 보통 위스키는 40도 정도에 맞추기 위해 물을 희석하는데, 캐스크 스트렝스는 물을 일절 섞지 않고 오크 통에서 곧바로 병입한 위스키다. 과거에는 알코올이 너무 강해 즐기지 않았지만, 근래에는 위스키 본연의 풍미를 원하는 수요가 늘면서 각 증류소마다 CS 모델을 늘려가는 추세다.




아일러를 누비는 사람들

바이알에 담긴 보모어의 시음용 위스키.

아일러섬은 연중 방문객들이 찾는 곳이지만 극성수기를 꼽자면 아일러 페스티벌 (feisile.co.uk)이 열리는 5월 말과 6월 초 사이다. 스코틀랜드게일어로 페이스 일레Feis lle라 부르는 축제 기간에는 섬의 모든 위스키 증류소가 공연 무대로 바뀌고 한정판 위스키를 선보이는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전 세계 위스키 애호가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나 역시 아일러 페스티벌에 맞춰 여행을 계획했다가 금세 단념해야 했다. 숙소는 물론, 섬을 오가는 교통편 모두 이미 예약이 마감됐기 때문. 아일러 페스티벌을 온전히 즐기고 싶다면 최소 1년 전 예약이 필수다.


물론 아일러를 찾은 이들이 모두 위스키 증류소만 둘러보는 것은 아니다. 온화한 멕시코만류가 흐르는 덕분에 겨울에 북단에서 수많은 종류의 철새들이 건너오고 이를 보기 위한 탐조객과 사진가들이 섬 곳곳의 포인트를 찾아 나선다. 하루키가 에세이에 언급한 것처럼 작은 코티지에 몇 주간 머물며 차분하게 휴가를 보내는 사람들 또한 존재한다.


포트 앨런은 아일러섬의 메인 항구 역할을 한다.

페리 선착장에서 만난 윌 마셜Will Marshall의 목적은 조금 다르다. 스코틀랜드 남부에 사는 그는 종종 자신의 올드 디펜더를 끌고 캠핑과 바다낚시를 즐기기 위해 아일러를 찾는다고 일러준다. 호기심이 일어 섬을 떠나기 전날, 그가 알려준 아드네이브Ardnave로 향한다. 지도에도 정확한 루트가 나오지 않을 만큼 외딴곳이다. 마셜의 올드 디펜더 옆에 차를 세우고 언덕에 올라서니 드넓은 초지 너머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진다. 해안에 다가서자 마셜과 그의 친구들이 허리 가까이 차오른 바닷속에서 플라잉 낚시에 집중하고 있었다. 해초 더미로 뒤덮인 해안 암석 너머에는 검은빛의 피트 더미가 한 움큼씩 쌓여 있었다.


포트 앨런 서부의 킬너턴Kilnaughton만 풍경. 해안을 따라 카레이그 파다Carraig Fhada 등대까지 트레일이 이어진다.

이외에도 아일러 곳곳에는 매력적인 자연경관이 가득하다. 서쪽의 마키어 베이Machir Bay는 그림 같은 백사장이 깔린 해변으로 알려진 곳으로, 인근의 킬호만Kilchoman 증류소는 동명의 위스키를 선보이기도 했다. 아일러섬을 가로지르는 드라이브 또한 매력적인 경험이다. 보모어와 포트 앨런을 연결하는 B8016 도로는 20km 가까이 보리밭과 양 떼가 노니는 초원을 가로지르는 기분 좋은 코스다. 스코틀랜드의 매력적인 자연과 기품 넘치는 위스키, 그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섬을 즐기는 사람들. 아일러는 방문하기에 결코 쉬운 섬이 아니지만, 한번 그 매력을 알고 나면 쉬이 잊히지 않는 곳임이 분명하다. 다음 스코틀랜드 여행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관광객에게 덜 알려진 아드네이브 지역.


바다 송어 낚시를 즐기는 윌 마셜.

 

INFO


글래스고에서 아일러까지 운항하는 로건에어 항공편은 편도 약 80파운드부터(booking.loganair.co.uk). 케나크레이그에서 아일러를 오가는 칼맥 페리는 차량 편도 36.70파운드부터. 보모어의 로크사이드 호텔 더블 룸은 120파운드부터, 아일러 호텔 더블 룸은 330파운드부터. 보다 상세한 여행 정보는 아일러 앤드 쥐라 관광청 웹사이트(islayjura.com)에서 확인해보자.




Text & Photograph 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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