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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효는 무슨 맛

THE TASTE OF FERMENTATION

 

음식에 관해서라면 무슨 말을 해도 다 받아주던 시절이 있었다. “서양 사람의 혓바닥에는 전혀 발달돼 있지 않은 맛난 맛 - 곧 ‘발효미’ 지각 미역味域이 우리 한국 사람에게 가장 발달돼 있다”는 이야기가 그렇다. 과거 큰 인기를 끌었던 <조선일보>의 1987년 8월 7일자 이규태 칼럼에 실린 글이다. 서양에는 발효 음식이 거의 없다시피 한데 밥·반찬은 대부분 발효 식품이므로 한국인의 발효미 감지 능력이 세계 최고라는 주장은 1985년부터 1997년까지 다섯 번 이상 반복됐다.


근거 없는 주장이다. 학계 추산에 따르면 세계인이 소비하는 음식의 ⅓이 발효 음식이다. 된장, 간장, 김치만 발효 식품이 아니다. 맥주, 와인 같은 술도 발효 식품이고 피클, 사워크라우트 같은 채소절임도 발효 식품이며 초리소, 살라미 같은 육가공품도 발효 식품이다. 카카오를 초콜릿으로 만드는 과정에도 발효가 필수적이다. 멀리 갈 필요 없이 빵은 어떤가. 미생물이 만들어내는 유기산과 알코올은 음식의 보존성을 향상시킨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발효는 음식을 오래 보관하기 위한 중요 수단이었다. 오래 둔 음식이 상한 줄 알았는데 먹어보니 탈나지 않고 오히려 맛이 좋아지는 발견을 통해 생겨난 발효 식품도 많았을 것이다.


종류가 다를 뿐 발효 식품은 세계 식탁에 공통으로 오른다. 서양인은 발효 음식을 거의 안 먹기 때문에 발효미에 관한 한 한국인이 가장 발달했다는 주장은 사실 관계가 하나도 안 맞는다. 서양인이 발효 음식을 거의 안 먹는다는 주장은 완전히 틀렸다. 세계에 한국인과 서양인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팩트’는 동아시아가 발효 생선, 발효 콩의 중심이라는 사실이다. 한국,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에도 다양한 발효 음식과 소스가 있다. 한국인의 발효미 감지 능력이 가장 발달돼 있다는 주장 역시 과학적 근거가 전무한 허위 사실이다.


그런데 발효미란 무슨 맛일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레스토랑 ‘노마’의 르네 레드제피Rene Redzepi 셰프는 <노마 발효 가이드>의 서문에 노마의 중심적 특징이 발효라면서 이렇게 썼다. “그렇다고 우리 음식이 특별히 고약한 냄새가 난다거나 짠맛, 신맛 또는 사람들이 발효와 연관 짓는 다른 어떤 맛이 난다는 뜻은 아니다.” 레드제피는 발효가 노마에서 하나의 특정한 맛을 내는 게 아니라 모든 음식을 더 낫게 만드는 거란 설명을 하기 위해 이렇게 썼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일반적으로 발효미가 무슨 맛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짠맛, 신맛, 고약한 냄새가 나는 풍미다.


엄밀히 말해 짠맛은 발효로 생겨나는 맛이 아니다. 발효를 위해서는 소금이 필요하다. 미생물이 음식 속 당분을 발효하면 젖산과 같은 신맛 물질이 만들어지면서 단맛이 줄어든다. 하지만 소금 자체는 발효되지 않아 짠맛이 신맛과 함께 발효 음식의 주된 특징이 된다. 맥주나 와인을 만들 때처럼 발효로 당이 알코올로 바뀌기도 한다. 그 자체로는 아무 맛도 느낄 수 없는 단백질이 아미노산으로 분해돼 감칠맛이 풍부해진다. 고기 속 지방과 단백질이 산화되기도 하고 서로 반응해서 살라미나 초리소 같은 발효 육가공품의 풍미를 낸다. 지방이 지방산으로 쪼개지고 다시 더 짧은 단쇄지방산으로 잘리는 과정에서도 블루치즈 같은 자극적 향기를 내는 물질이 만들어진다.



발효 음식에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


한국인의 신맛, 짠맛 감지 능력이 특별히 뛰어나다는 연구 결과는 없다. 그런데도 1990년대 사람들은 이규태 칼럼에 반복되는 틀린 이야기에 별일 없이 넘어갔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시절이었으니 우리가 최고라는 말에 솔깃했을 법하다. 숨겨진 또 하나의 이유는 발효의 냄새다. 요즘에야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같은 TV 프로그램에서 외국인이 한식을 맛있게 먹는 장면이 종종 비치지만 90년대까진 아니었다. 한국에 처음 방문한 외국인이 장류, 젓갈, 김치와 같은 발효 식품을 맛보고 얼굴을 찡그리는 표정이 브라운관에 종종 등장했다. 먹어보면 얼마나 맛있는데, 저걸 모르나 싶었을 거다. 하지만 그 표정은 곧 후천적으로 배워서 얻은 입맛이며 정확히 말해 냄새에 대한 선호도를 나타내는 증표다. 냄새를 더 잘 맡거나 감지하는 게 아니다. 대학 시절 동기 하나는 1996년 LA 공항 식당에서 샐러드에 끼얹은 블루치즈 드레싱을 처음 맛보고 냄새에 질려 이틀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못했다.


발효된 음식의 냄새가 부패한 음식의 냄새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게 아마도 그런 혐오의 원인일 수 있다. 하지만 막상 먹어보고 별 탈이 없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냄새에 자주 노출돼 익숙해지면 거부감이 준다. 하지만 유전적으로 특정 발효 음식 냄새를 극복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유럽인이라고 전부 치즈를 좋아하지 않는다. 치즈 혐오에 대한 연구로 이그노벨상을 탄 장피에르 루아예Jean-Pierre Royet에 따르면 프랑스인 11.5%가 치즈 냄새를 혐오한다. 치즈가 상한 음식으로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음식이 아닌 어떤 것으로 보일 정도라는 거다.


누군가 발효 음식에 대한 본능적 혐오를 극복하지 못한다고 해서 비난할 순 없다. 썩은 냄새에 대한 혐오는 식중독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 2020년 10월 중국 동북 지역의 헤이룽장성 지시시 지둥현에서 비극이 일어났다. 옥수숫가루를 발효시켜 만든 면 요리인 쏸탕즈를 먹고 9명이 사망했다. 코코넛, 옥수수를 발효하는 과정에서 유해 세균 오염으로 봉크레크산이라는 치명적 독소가 생겨난 걸 모르고 먹었기 때문이다. 가족 구성원 중 발효 음식의 냄새가 싫어서 입에 대지 않은 어린이 셋만 생존했다. 발효에서 경계선을 넘으면 부패가 된다. 경계선을 넘지 않도록 통제하려면 과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식품 산업에서 특정 발효 균주를 선별하거나 발효 조건을 엄격하게 제어하는 건 유해균 오염을 막고 발효를 최적화하기 위함이다.



발효 음식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


장 속에서도 발효가 일어난다. 고기를 잘 안 먹던 사람이 갑자기 육류를 많이 섭취하면 배에 가스가 차고 소화가 잘 안 되는 느낌이 들 수 있다. 소장에서 소화·흡수되지 못한 단백질이 대장 미생물에 의해 발효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화할 수 없는 이눌린과 같은 다당류도 장에서 발효된다. 유당을 분해하는 효소가 없는 성인은 우유를 마시면 장에서 흡수되지 못하고 미생물 발효로 배에 가스가 차고 복통을 경험한다. 미생물에게 소화의 일부를 맡겨 미리 음식의 일부를 소화시킨 발효 음식이 속에 더 편안한 느낌을 주는 건 그래서다.


흥미롭게도 발효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퍼멘테이션Fermentation’은 끓이다는 뜻의 라틴어 ‘페르베르Fervere’에서 왔다. 발효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스로 인한 거품이 액체가 끓을 때와 비슷하게 보이는 데서 착안한 말이다. 발효 음식은 원래 음식보다 소화가 잘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우유를 마시면 속이 불편한 유당불내증이 있는 사람도 대개 요구르트나 치즈는 어느 정도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유당이 전부 발효되지 않고 일부 남아 있어 유당불내증이 심한 사람은 배가 아픈 경우도 있다.) 미생물 발효로 비타민, 항산화 물질, 항염증 물질 같은 건강에 유익한 기능성 성분도 생겨난다. 발효 음식 속 유익균이 먹는 사람의 장에 정착하거나 발효 산물이 장내 유익균의 먹이가 되어 장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많다.


그렇다고 지나친 환상은 곤란하다. 발효에 사용되는 미생물이 반드시 인체에 유익한 부산물만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뛰어난 맛과 보존성으로 수천 년 동안 먹어온 발효 생선이지만 섭취량이 과하면 비인두암 위험이 증가할 수 있다. 술도 발효 음식이다. 하지만 포도를 발효해서 만든 와인이 포도보다 건강에 유익한 음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요즘 미국에서는 제초제나 농약, 첨가물을 사용하지 않고 만든 클린 와인을 건강에 좋은 와인처럼 광고하는 업체가 늘고 있다. 하지만 알코올은 알코올이다. 제조 방법에 관계없이 지나치게 마시면 건강에 해로운 건 마찬가지다. 한계를 제대로 알고 활용할 줄 아는 게 요리사의 지혜다.




Text 정재훈 | Edit 곽봉석 | Photograph 류현준


정재훈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한 후 캐나다 토론토에서 다년간 약사로 일했다. 음식만큼이나 사람들과 요리와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한다. 잡지, TV, 라디오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음식과 약에 대한 과학적 정보를 전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정재훈의 식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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