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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미 발효연구가

THE NEW CLASSIC

 

한국인은 ‘발효’ 하면 찌개나 김치부터 떠올린다. ‘발효는 올드하다’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그런 발효를 세련되게 풀어낸 사람이 있다. 현재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김유미 셰프다. 셰프라는 타이틀로 불리기도 하지만 사실 정확한 그의 직업은 발효연구가다. 소금, 쌀누룩, 술지게미 등으로 발효시킨 제철 채소가 조금씩 올라간 기다란 플레이트와 비트 피클 주스로 만든 젤리를 얹은 큼지막한 석화, 영귤시오코우지로 마리네이드한 삼치. 밤큔에서 선보인 새로운 메뉴는 설명만 보았을 때는 낯설지만 알록달록 예쁜 담음새로 호기심을 자아냈다. 김유미는 우리가 몰랐던,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발효법과 새로운 식재료를 사용한 레시피를 선보이며 발효를 전파하고 있다.


아마자케를 만드는 과정
아마자케를 만드는 과정 아마자케는 쌀에 코우지균을 배양해 만든다. 보온 모드로 설정한 밥솥을 뚜껑을 연 채 천을 덮어 발효한다. 설탕을 넣지 않고 만든 곡물 자체에서 내는 은근한 단맛은 시판되는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완성한 달큼한 아마자케는 따뜻하게 데워 마신다. 한 모금에 추운 겨울 얼어붙은 몸이 살살 녹는다.


해외 생활을 오래 했다고 들었다.

— 대학 졸업 후 도쿄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당시 취미로 일본 전통문화를 배웠는데, 전통 악기를 연주하거나 전통 과자와 음식을 만들었다. 8년간의 도쿄 생활을 끝낸 뒤엔 파리로 떠나 예술사 공부를 시작했다. 파리는 식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큰 도시이면서 남편을 만나게 해준 도시다. 남편은 생물학자인 동시에 대체 에너지를 개발하는 일을 했다. 버려진 나무 쓰레기를 발효해 새로운 에너지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의 대체 에너지 지식과 내 요리가 만나 새로운 푸드 테크 사업을 시작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미국에서 회사를 운영하며 동물성 식품을 대체할 식품을 개발하고 맛을 구현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그때 ‘발효’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발효연구가’라는 직업은 아직 국내에 생소하다.

— 대체 식품을 개발하며 고민이 많았다. 결국 과학적인 관점에서 감칠맛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육류를 사용하지 않고 감칠맛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다 보니 가열과 발효가 맛을 이끌어낸다는 걸 발견했다. 당시 미국은 덴마크에서 온 신발효 문화가 떠오르던 시기였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들이 아직 모르는 아시아의 발효를 더욱 알리고 싶었다. 영양과 환경 두 가지를 모두 잡을 수 있는 흐름을 찾은 거다.


연구가로서 발효에 접근하는 방법이 궁금하다.

— 꼭 과학적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평소 먹는 ‘발효 음식’을 떠올려보자. 엄마가 만든 김치와 찌개, 고추장과 된장 같은 담금 장류와 식초, 와인과 치즈는 모두 우리에게 익숙한 음식이다. 사워도우 빵이나 피클, 템페처럼 세계 각국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온 발효 문화도 넓고 다양하다. 실제로 우리는 하루에도 발효 음식을 몇 종류씩 섭취하고 있을 거다. 나 역시 처음엔 김치와 피클을 담그고 천연 발효종을 키워 빵을 굽는 걸로 시작했다. 점점 재미를 붙여 누룩곰팡이와 템페균, 낫토균, 치즈 곰팡이 등 새로운 균에도 도전했다. 균마다 고유의 성질과 필요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공부가 필요하다. 발효는 결국 수많은 외부 요소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경험이 답이다. 책이나 레시피에 의존하기보다 원하는 맛과 발효 정도가 나올 때까지 시간과 재료의 양을 조절해가며 여러 번 작업하면서 감을 익히는 게 중요하다.


연구할 때 참고하는 게 있다면?

— 일본, 프랑스, 미국에서 생활하며 직접 맛보고 배운 모든 걸 정리해 요리에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인지 내 요리는 꼭 나를 닮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참고하는 인물은 산도르 카츠Sandor Karz. 기본적이고 자연스러운 발효에 대한 수많은 책을 쓴 작가 겸 발효 문화 운동가다. ‘발효의 바이블’이라고 불리는 <발효의 기법(The Art of Fermentation)>을 집필했는데, 지금도 테네시주에서 발효 문화를 알리며 발효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인물이다.


발효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인가.

— 핵심은 내 손과 공기 중에 있는 미생물들의 기분이다. 청결과 온도, 습도 등 최적의 환경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발효는 균과 재료를 돌보는 하나의 소통이다. 인간은 그저 균이 건강하게 잘 자랄 수 있도록 도와줄 뿐 나머지는 균의 기분에 달렸다. 균의 기분만큼 발효가의 기분도 중요하다.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에서 균을 돌보면 쉽게 부패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간혹 양조장에서 노래를 부르며 균을 뿌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발효된 식재료와 발효되지 않은 식재료에 차이가 있다면?

— 재료가 발효되면 소화시키기 쉽다. 세계적으로 발효 음식이 각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균은 식재료 고유 성분과 만나 새로운 작용을 일으키며 우리가 음식을 입 안으로 넣어 위에서 장까지 도달하는 소화 과정을 돕는다. 또 풍부한 유산균이 대장을 깨끗이 유지해준다.


발효가 주목받는 이유가 단순히 ‘건강’을 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 물론이다. 발효의 가장 큰 매력은 맛이다. 발효의 맛은 식재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탄수화물이 효모에 의해 당화 작용을 일으키면 단맛이 강해진다. 곡물로 술을 빚는 원리도 이 때문이다. 젓갈이나 치즈, 된장을 먹을 땐 감칠맛이 돋보인다. 발효의 감칠맛은 단백질이 분해되는 과정에서 나온 글루탐산의 역할이 크다. 분해 과정에서 본래의 가진 맛을 한층 더 끌어올려준다. 작년 12월 밤큔을 진행할 당시 소금만 넣고 발효한 무말랭이 메뉴를 선보였다. 익숙한 재료로 만든 간단한 요리지만 인기가 많았다. 이 요리에서 발효가 선사하는 맛의 힘을 확신했다.


그래서인지 최근 발효 트렌드가 떠오르고 있다.

— 발효의 뉴웨이브는 2010년 세계 레스토랑에 덴마크의 ‘노마’가 선정되며 시작됐다. 덴마크에서 시작된 발효 붐은 북유럽 전체에 퍼지면서 미국으로 전파됐다. 유행에 민감한 미국 동부의 보스턴과 뉴욕은 발효 워크숍을 열고 다양한 음식 연구 회사들이 생겨나며 발효 연구에 깊게 파고들었다. 흐름은 다시 서유럽으로 넘어갔다. 스페인 농장에서 김치를 담그고 프랑스에서는 미소 워크숍이 열리는 등 발효가 하나의 콘텐츠로 자리를 잡았다. 작년에 도쿄를 방문했을 땐 이미 발효 관련 서적과 레스토랑, 카페가 셀 수 없이 생겨나고 있었다.


국내의 흐름은 어떠한가.

— 한국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발효가 어렵다는 이유로 가깝고도 먼 문화로 여기고 있다. 한국의 대표 발효 식품인 ‘장’만 봐도 그렇다. 장 담그기는 명인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진입 장벽이 높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마트에 가면 고추장용 메줏가루를 판매할 정도로 발효가 일상에 만연하다. 집집마다 술을 빚던 나라였음에도 여전히 일제강점기 금주령 당시 만든 법 때문에 가양주나 술지게미를 이용하는 데 제한을 받기도 한다. 콩을 삶아서 찧고 뭉친 후 말려 만드는 자연스러운 곰팡이, 메주로 담그는 간장, 된장, 고추장처럼 한국 음식의 역사는 발효와 관계가 깊다. 김치는 유산 발효 식품 중 가히 최고라 단언한다. 발효 식문화를 좀 더 살펴보고 즐기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발효를 처음 시도하는 사람에게 줄 팁이 있다면?

— 요리에 정답은 없다. 기존의 방식을 고수할 필요도 없다. 해외에 살면 구하기 어려운 재료가 많다. 그럴 땐 아시안 마트에서 비싸게 사는 것보다 현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저렴한 재료로 대체해도 좋다. 국산 콩 대신 품질 좋은 유기농 콩을 사용하거나 래디시로 만드는 깍두기, 양배추 김치가 그 예다. 그렇게 새로운 메뉴가 나오기도 한다. 본인의 가치관과 철학을 함께 숙성시키고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맛을 내며 미학으로 접시를 채운 음식이야말로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 된다.


 


식초에 절인 고등어와 유자 미소 드레싱을 곁들인 곡물 샐러드

식초에 절인 고등어와 유자 미소 드레싱을 곁들인 곡물 샐러드

추운 겨울엔 등 푸른 생선이 별미다. 통통한 살에 기름이 차올라 구워 먹어도 맛있지만 식초를 활용해도 좋다. 식초의 산에 의해 생선 살이 단단해지고 지방은 고소해져 또 다른 풍미를 선사한다. 시큼하게 절인 고등어의 산도에 맞춰 곡물을 추가해 먹곤 하는데, 별다른 양념 없이 올리브 오일과 허브만 곁들여도 훌륭한 샐러드가 된다. 백미소에 유자 껍질과 미림을 넣어 드레싱을 만들었다. 유자 향과 백미소의 고소함이 더해지고 샐러드에 자연스레 간이 된다. 노랑 순무와 콜리플라워, 양파 피클로 재미있는 식감을 만들고 포만감을 위해 퀴노아와 렌틸콩, 쌀을 곁들이면 건강하고 맛있는 한 끼 식사가 된다.



그래놀라와 배, 사과, 밤 퓌레, 생강 시럽을 올린 아마자케

그래놀라와 배, 사과, 밤 퓌레, 생강 시럽을 올린 아마자케

일본에선 1월 1일에 따뜻한 아마자케(甘酒, 감주)를 마시며 새해를 맞이한다. 쌀을 익힌 후 쌀누룩을 넣고 8시간 정도 발효해 만드는 아마자케는 짧은 시간으로도 완성할 수 있는 발효 음식이다. 특유의 달달한 맛 때문에 설탕 대신 요리에 쓰기에도 좋다. 달콤한 아마자케 위에 좋아하는 과일과 그래놀라를 함께 곁들이면 간단한 아침 식사나 간식으로 제격이다.



비트후무스와 발효 허브 두부를 올린 오픈 샌드위치

비트후무스와 발효 허브 두부를 올린 오픈 샌드위치

최근 후무스와 캐슈 치즈를 빵과 함께 먹는 비건 식생활을 즐긴다. 질릴 땐 두부를 활용한다. 물기를 뺀 두부에 시오코우지를 뿌려 며칠간 발효시키면 짭짤하고 단단해진다. 거기에 바질 페스토를 버무리면 허브 치즈를 먹는 것 같다. 비트 파우더와 쿠민, 고수를 넣은 후무스는 곱게 물든 색만큼 뛰어난 맛을 자랑한다. 샐러드와 비트 피클을 올려 함께 먹으면 입 안 가득 느껴지는 감칠맛의 재미가 쏠쏠하다.




Edit 이유나, 김지현 | Photograph 류현준, 박다빈, 김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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