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 화이트 인스타그램 아이콘
  •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아이콘
  • 화이트 유튜브 아이콘
  • 화이트 페이스북 아이콘

셰프들의 길을 이끄는 북극성

MICHELIN IS

 

런던 미쉐린 가이드가 뜨는 날이었다. 우연히 영국 신문기사를 보다가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그 이름은 내가 고든 램지 레스토랑 중 하나인 페트뤼스Petrus에서 무급 인턴을 하던 시절, 페이스트리 세션에서 일하던 존이었다. 기사에는 미쉐린 가이드 신판을 사기 위해 신문 가판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존과 나눈 인터뷰가 실려있었다.


존의 모습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똑똑히 기억난다. 내가 일했던 페트뤼스는 고든 램지의 레스토랑 중 하나로 2010년 오픈하자마자 별 하나를 받았다. 그곳에는 20대 후반의 헤드셰프를 비롯해 20대 초반의 어린 셰프뿐이었다. 당시 회사를 그만두고 영국에 간 내가 서른 살로 나이가 가장 많았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사람은 설거지를 담당한 아프리카 이민자 한 명뿐이었다. 존은 겨우 스물세 살 정도였지만 디저트와 빵을 내는 페이스트리 섹션을 책임졌다. 그들은 열다섯 살 무렵부터 주방에서 일하니 경력으로 치면 거의 10년이 다 된 셈이었다. 처음 봤을 때 존은 오른팔에 붕대를 하고 있었다. 일하다 화상을 입어 치료 받는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일을 쉬지 않았다. 대신 한 손으로 일했다. 외국은 휴일을 정확히 지키고 근무시간 또한 그렇다는 말은 주방에서 통하지 않았다. 주방에서는 새벽 7시부터 자정 가까이까지 매일 16시간의 살인적인 근무가 이어졌다. 나이 많은 셰프가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고든 램지 레스토랑의 셰프들

그들이 젊음을 갈아넣는 이유는 하나였다. 이력서에 경력을 써넣기 위해서였다. 그 중요한 이정표가 바로 미쉐린 스타였다. 셰프들은 미쉐린 스타를 수집하듯 경력을 쌓았다. 별 하나에서 2개로 올라가면 노동의 강도는 더욱 세졌다. 3개가 되면 끔찍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심지어 급여를 주지 않고 일을 시키는 무급 인턴(내가 했던)이 정직원보다 더 많은 곳도 수두룩했다. 무급 인턴은 정직원이 하기엔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허드렛일을 도맡아했다. 손님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접시 하나에 무급 인턴 몇 명이 달라붙었다. 무급 인턴의 목표도 하나다.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 경력이다.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 경력은 또다시 좋은 레스토랑에서 경력을 이어가게 해주는 훌륭한 다리가 된다. 주방에서는 사무직과 달리 경력을 ‘증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하루만 같이 부대껴보면 그 경력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바로 알 수 있다. 몸으로 일하는 직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 경력이 어느정도 있는 이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혹독한 근무 환경을 어떻게든 버텼다. 주방 내부에서 벌어지는 끝도 없는 경쟁과 정치도 이겨냈다. 구도자와 같은 자기수련의 이정표 곳곳에 바로 미쉐린의 별이 떠 있었다.


불을 쓰는 주방 너머 페이스트리 섹션에서 존은 늘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그러면서 다른 이들이 일하는 모습을 수시로 지켜봤다. 일의 흐름을 파악하고 지적했다. 내가 맡은 일 중 하나는 식전빵을 오븐에 데워서 써는 것이었다. 200°C로 맞춘 오븐에 빵을 넣고 2분을 기다린다. 그리고 썬다. 이 단순한 일도 쉽지 않았다. 프랑스인 웨이터는 늘 알아듣기 힘든 영어로 나를 재촉했다. 딱딱한 빵을 일정한 간격으로 썰다보면 빵칼의 날이 점점 무뎌지는게 느껴졌다. 전쟁같은 서비스를 하다보면 오븐 앞에서 기다리는 2분은 마치 영원같았다. 존은 멍청하게 오븐 앞에 서있던 나를 옆으로 밀더니 오븐 속에 맨손을 넣어 빵을 꺼냈다. “만져봐. 꼭 2분을 지킬 필요는 없어. 겉이 바삭하면 된거야.” 그 말과 함께 빵을 나에게 건넸다. 빵은 너무 뜨거워 맨손으로 들기 어려울 정도였다. 잘라보니 빵은 속까지 잘 데워져 있었다. 놀란 표정으로 존을 바라봤다. 존은 나를 보며 아주 희미하고 짧게 웃더니 다시 일을 했다.


한국에 미쉐린 가이드가 들어온지도 몇 년이 흘렀다. 언론과 그 언론을 접하는 일반인에게 미쉐린 가이드는 일부 미식가가 펼치는 그들만의 잔치일지도 모른다. 미쉐린의 별보다는 빕구르망 딱지가 붙은 식당이 더 현실적인 가치를 지녔을 것이다. 빕구르망은 그 나라의 스트리트푸드, 즉 대중이 즐겨찾는 식당의 가성비 및 의미 등을 고려해 선정하는 또 다른 등급이다. 길게 이어진 빕구르망 리스트 역시 한 나라가 지닌 문화적 역량을 볼 수 있는 지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쉐린 별의 의미를 넘어서기엔 역부족이다.


〈미쉐린 가이드 서울 2021〉 2스타 레스토랑 ‘정식당’. 임정식 셰프는 모던 한식 파인 다이닝을 개척한 주인공으로 평가받는다.

한 나라에 미쉐린 별이 몇 개나 떴느냐는 그 나라의 미식 수준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된다. 2021년 도쿄 미쉐린 가이드에 따르면 도쿄에는 1스타 레스토랑이 158개, 2스타가 42개, 3스타가 무려 12개다. 별 개수를 모두 합치면 212개라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나온다. 서울은 1스타가 23개, 2스타가 7개, 3스타가 2개로 별 개수의 총합은 32개다. 미쉐린 스타로 단순히 평가했을 때 서울의 전반적인 미식 수준은 도쿄의 약 1/6에 불과하다. 미쉐린 가이드의 일본 사랑은 늘 논란의 여지가 있다. 2007년 도쿄에 미쉐린 별을 처음 주었을 때 융단폭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당시 도쿄에 3스타 레스토랑이 여덟 곳 선정되었는데, 이에 반해 미식의 고향이라는 파리는 열 곳, 뉴욕은 세 곳 , 런던은 한 곳이었다. 도쿄가 파리에 버금가는 곳인가, 뉴욕이 왜 도쿄보다 못한가 등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아무도 일본이 미식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그 세부가 어떻든간에 미쉐린 별은 미식의 척도 그 자체인 것이다.


미쉐린 가이드가 유럽 이외의 지역에 진출할 때는 이른바 ‘스타 인플레이션’이 일어난다는 지적도 늘상 있다. 프랑스 파리의 1스타와 타 지역 1스타가 같은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체험해보면 여전히 본토와 타 지역 레스토랑 사이에 어느정도 간격은 있다. 미쉐린 가이드가 각각의 국가 전통 음식에 대해 편향되고 관대한 평가를 한다는 것도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에 반해 프렌치 레스토랑은 상대적으로 박한 평가를 받기도 한다. 즉 자국 프렌치 음식에는 깐깐한 반면 타국의 전통 음식은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또 후하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미쉐린 가이드가 올림픽과 같이 국가간 경쟁이나 엄밀하고 객관적인 평가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닌, 말그대로 관광 가이드라는 실용적 목적으로 탄생한 배경에 이유가 있다. 그 나라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외국관 광객 입장에서 가볼 만한 곳을 추리다보니 어쩔 수 없는 편향이 생기는 것이다.


2016년 세계에서 28번째로 한국에 미쉐린 가이드가 상륙한 이래,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국의 레스토랑을 전 세계의 레스토랑과 비교할 수 있는 척도가 생겼기 때문이다. 관광객이든 자국민이든 스타 레스토랑을 체험한 사람 입장에서는 일정 수준을 바랄 수밖에 없게 됐다. 레스토랑 입장에서도 스타를 받기 위해 충족해야하는 일정한 기준에 따라서 비스, 음식, 각종 부대시설을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실질적 필요가 생겼다. 이런 선순환 구조는 지난 몇 년에 걸쳐 한국 레스토랑의 전체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원동력이었다. 매출이라는 단 하나의 지표에서 미쉐린 스타라는 상징적 자원 역시 레스토랑 운영의 중요한 목적이 되었다. 스타를 노리는 자본과 인력이 레스토랑 시장에 몰려들었다. 외국 레스토랑을 벤치마킹하려는 노력, 외국에서 경력을 쌓은 수많은 셰프가 미쉐린 가이드가 상륙한 이후 한국으로 귀국했다. 미쉐린 스타라는 목표가 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만약 한국에 미쉐린 가이드가 없다면, 한평생 별을 좇아 경력을 쌓은 셰프 입장에서는 많은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이제는 한국에서 그 별을 얻을 수 있으니 이 나라도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었다.


별을 받는 오너셰프, 혹은 주방장이 아닌 불앞에 서서 땀을 흘리는 일선 셰프들에게도 미쉐린 스타는 큰 의미를 지닌다.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에서 일했다는 자부심과 경력은 해외에서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결국에는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과정이 길게 펼쳐지지만, 최소한 외국에서 경력을 쌓을 수 있는 훌륭한 시작점이 된다. 미쉐린 가이드는 미식 생태계라는 큰 틀에서 볼 때 시장 조성자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매년 미쉐린 가이드 를 발표하는 날 터지는 샴페인과 사람들의 환호성을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노라면 오래 전 주방에서의 기억이 떠오른다. 차갑고 푸른 눈으로 나를 지켜보던 동료들, 귓엣말로 욕을 하고 다그치던 억센 사내들, 서비스가 끝난 깨끗한 주방에서 나에게 맥주병을 건네던 그들은 지금 어느 나라, 어느 레스토랑에 있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면 도돌이표처럼 다시 존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런던의 서늘한 아침, 늘 안개가 끼는 나이트 브리지Knight Bridge에서 미쉐린 가이드를 기다리던 존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존이 전해올 소식을 기다리던 동료 셰프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하얀 리넨이 펼쳐진 아름다운 홀과 달리 호텔 뒤편 쓰레기장을 거쳐 어두운 통로를 지나 들어가는 주방의 뒷문, 그 안에서 땀과 피를 흘려가며 젊음을 바치던 그들에게 미쉐린 가이드는 작은 책자 이상의 의미였을 것이다.


그해 페트뤼스는 1스타를 그대로 유지했다. 존은 생긴 지 얼마 안 된 레스토랑 치고는 나쁘지 않은 성적이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지금도 페트뤼스는 여전히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이다.




Edit 정동현(푸드 칼럼니스트)

Comments


bottom of page